“모든 이야기는 끝났어요.” 용사는 무사히 임무를 마쳤고, 왕국은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답니다. 오랜 모험을 한 용사는 평화를 가져다준 영웅이라 칭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란을 잠재운 용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냈답니다. 함께 모험했던 용사의 동료? 물론, 그도 행복하게 지냈답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길을 떠난 동료들도 있었지만, 모두 각자의 행복을 위하여 인사를 건네주었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뜻을 이루지 않았나요?” 신관의 물음에 기사는 말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용사는, 기사는 신관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고 고개는 땅으로. 가련히 몸을 떨며 숨죽여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려 했어요. 신관의 질문처럼 용사는 모든 뜻을 이루었습니다. 처음으로 신이 빚어낸 유리 인형이 땅으로 내려온..
“….” 어김없이 호선을 그리던 입가의 미소, 휘어지는 눈꼬리도 접은 채, 한 떨기의 꽃은 가느다란 팔로 들고 있던 펜을 떨구었다. 꽃은 살아남았다. 옅게 틔워오는 햇볕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웃을 수 있고,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다. 다른 존재들처럼 생생하게 이 땅에서 살아있었다. 잔혹하리만치 아름답게, 꽃은 살아남아 아직도 어여삐 피어나 있었다. 가느다란 투영검을 빼어 들며 질척이는 핏길을 함께 걸었다. 아무도 걷지 않을 길, 진창같이 구르는 따가운 매 순간을 기도 삼아 피조물을 빚은 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꽃은, 에브루헨 아모치온은 언제나 그의 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푸른 유리 인형. 아아, 아름다운 유리인형…. 언..
“이제는 정말 여한이 없어요.” 가느다란 손은 언제나 하늘을 향했다. 제 몸을 빚어준 존재가 건네준 뜻을 펼치기 위하여 길을 열었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유리 인형은 잘박거리는 진창을 걸었다. 칠흑 같은 밤,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서슴없이 걸었다. 언젠가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피조물이 같은 길을 걸으며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제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며 기꺼이 등을 맡길 수 있도록 곁을 내어주는 동료, 어느새 세상의 근원과 연결된 기사와도 물들며 매일 밤 소리 없는 언쟁을 벌였다. 인간에게 물든다면 일을 그르칠 것이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조금 더 함께 머무를 수 있다면 뜻을 이루더라도 결말이 달라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저도 모르게 생겨버린 이질적..
“….” 세상 가여운 존재들을 위하여 초점 없는 눈동자는 손을 내밀었다.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맞이할 죽음 가까이에서.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조용히 방향을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베풀 수 있는 선행인지,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일을 자처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참으로 이질적인 존재였다.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거쳐 가는 손길마저 흔적이 남지 않는 기이한. 죽어버린 호수는 물소리마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맑게 흐르는 물가가 아닌 암녹빛의 탁한 수면. 제 깊이를 알지 못하고 발을 디디는 순간 끝도 없이 가라앉아버릴 테지. “헤르셔.” 나는, 그곳에서 빠져 죽고 싶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제 몸을 던지고 사방이 죽어버린 너로 가득 채우면. 필시 행복..
“언제든 찾아와도 상관없어요.” 나는 호수,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게 열린 하늘 아래 펼쳐진 둥글게 쏟아지는 달을 비추며 맑게 반짝이는 은빛의 또 다른 하늘의 이름. 에브루헨 아모치온, 마지막까지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나 하나의 의지로 선택한 신의 피조물. 엇갈린 선택의 갈래에서, 여신을 따르는 내 사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나는 내 의지로, 끝을 맞이하고 싶어요. 툭, 던진 말에 아메 서머터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인간 놀음에 물들여서는 네가 진정으로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건가요? 헛소리도 이제는 정도를 넘어섰군요. 고운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예상할 수 있는 말들이라 생각하며 어떤 말을 하더라도 받아낼 것이라 다짐했습니다. 그는, 아메 서머터지는 오직 사명만을 생각하던 사..
서로의 온기가 맞닿던 순간, 나는 입을 뗄 수 없었습니다. 항상 불러주던 이름도, 안아주던 포옹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없이 고요하고 가라앉습니다. 이곳은 어두운 밤바다, 마지막까지도 더없이 행복한 추억만을 안고 가더라도 뼛속까지 시려오는 냉기에 온몸을 덜덜 떠는. 상실의 순간이 더욱 아프고 생살이 찢기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곳입니다. “어땠어요?”나는 덮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질문을 건넸습니다. 따뜻한 온기가 식는 동안,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마음껏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마음껏. 나누어보도록 해요. 입을 연 순간부터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것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기대’라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것을..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아메 서머터지는 늘 검을 들었다. 지나간 자리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을 누군가의 육신에서 따뜻하게 흘렀을 무언가의 흔적이 흙바닥을 타고 흘렀다. 흙은 빠르게 흔적을 삼켜내고 어둡게 검은 망토를 둘렀다. 한가득 피를 마셔버린 땅은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여신께서도 싫어하시겠지만, 그것도 모두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것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선혈이 낭자 하는 길. 기도하는 손은 아름다울지언정, 하이얀 코트 끝자락에서 검을 든 그의 뒷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그것이 아메 서머터지가 걸어가는 길이였다. 철저하게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도록. 다른 생각을 품지 않도록 계속해서 자신을 되뇌길 반복한다. 찬양하라, 신성의 힘을. 버텨봐요. 이 환상을…. “꽃이 참 예쁘게도 피었..
이전에는 꽤 많은 인간이 찾아왔습니다. 꽃을 엮은 머리띠며, 초를 띄운 종이배. 들고 온 공물들을 띄우며 들릴 듯한 목소리로 제각기 소원을 비는 것을 멀찍이 구경하는 일도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맑은 물이 흘렀고, 수면에는 깊은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였습니다. 죽어버린 탁한 물보다는 깨끗한 물이 오히려 투명하기에 얼마나 깊은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생명 하나 살지 않는 이곳에는 오가는 발길이 만들어낸 작은 길과 지나간 자들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전부 옛이야기지만….” 그렇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했습니다. 숲에서 이곳으로 지나오며 자박거리는 발도 끊겼습니다. 초목은 길을 덮었고, 기도문을 외며 신을 찾는 자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
5월 X일오월입니다. 비가 내리는 날도 있었지만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는 것을 몸으로도 느껴집니다. 고개만 내밀던 싹은 받아마신 물에 힘껏 기지개를 켰고, 예전에 함께 심고 네가 걷어둔 씨앗이 또다시 꽃으로 돌아왔습니다. 분명 피어난 꽃을 보면 당신은 이름을 부르며 좋아했겠지만 나는 당신처럼 꽃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아니기에 그저 피었다는 사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느 정도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자리를 잡는다면 몇 송이를 따로 화분에 담아 만나러 가는 날에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책만 본다고 여신님이 찾아오는 거도 아니잖아요”툴툴거리는 당신의 말에 결국 나는 인상을 찌푸립니다. 텁, 두툼한 종이뭉치 소리를 협탁 위에 올려두고 한껏 힘이 들어간 미간..
“너를”누군가 사랑받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거리낌 없이 너를 가리켰을 것이다. 움푹 들어간 볼우물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흘렀고, 빙긋 웃는 미소가 그린 길에서는 풀꽃 냄새가 났다. 싱그러운 숲은 사랑받는 너였다. 숲의 푸르름에 빠져든 모든 존재는 행복하게 웃음을 지었고, 눈물 따윈 흘리지 않았다. 그곳은 동화 속 평화로운 마을만큼이나 ‘꿈’과 같은 장소였으니까. 초록빛 잎사귀들 사이로 비치는 햇빛, 반짝이며 돌이 이어놓은 길을 노래하며 흘러가는 물가. 아름다운 숲은 어여쁜 너였다. 너는 어여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사람이든, 함께 등을 맞대고 전장을 뛰어다니던 동료든. 모두가 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이제야 너를 알게 되었다. 찾아온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