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E

[아눌헤르_질식]

✿달꽃 2018. 11. 25. 23:07

.”

세상 가여운 존재들을 위하여 초점 없는 눈동자는 손을 내밀었다.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맞이할 죽음 가까이에서.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조용히 방향을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베풀 수 있는 선행인지,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일을 자처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참으로 이질적인 존재였다.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거쳐 가는 손길마저 흔적이 남지 않는 기이한.

죽어버린 호수는 물소리마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맑게 흐르는 물가가 아닌 암녹빛의 탁한 수면. 제 깊이를 알지 못하고 발을 디디는 순간 끝도 없이 가라앉아버릴 테지.

 

헤르셔.”

나는, 그곳에서 빠져 죽고 싶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곳에서 제 몸을 던지고 사방이 죽어버린 너로 가득 채우면. 필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의 끝에서 수많은 눈을 드리우며 공간을 바라보는 너는 초점을 흐렸다. 빛마저 삼켜버리는 죽은 호수는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따뜻했다. 아아, 그래. 너도 알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를 알아주는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 거기 있었나.”

나는 여기 있다.”

나는 호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전히 초점 없는 눈동자는 피조물을 가엽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믿음이 간절했기에. 사실은 누구보다 간절했고, 도움을 바랐을 너이기에. 덧없고, 의미 없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가여운 자들을 위하여 공허로 안내하는 것일 테지. 어느 하나 모르는 이가 없다 한들 나는 알 수 있었다. 너를, 사랑하기에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호숫가에 발을 담그면, 멀리 퍼져나가는 파동에 빛이 서리고 따스하게 제 몸을 받아들여 줄 것이다.

 

참으로 긴 시간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물리적인 의미를 떠나, 마음 한 곳에서 흐르는 초침은 수도 없이 움직였다. 믿음이 깨지고, 필사적으로 답을 구원하던 신관의 육신은 혼돈에 깎아 스러졌다. 붙잡아보고자 닥치는 대로 몸을 기우고 구성하려 들었지만 달콤한 목소리며 의미 없는 짓이라고 단언하는 공허한 결말에 너는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렇게, 너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떠났다. 나로부터 떠나갔다.

 

감정을 잃어가는군.”

.”

말을 아꼈다. 마지막의 순간에 굳이 이 화제에 관하여 꺼내고 싶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의 의미를 알아채기라도 한 듯 헤르셔는 눈을 가늘게 뜨는 것으로 대신했다. 새삼, 한쪽에서 가느다란 꽃을 안아 들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공허의 군주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아눌라르, ‘시엘이라 불린 자여.”

.”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지않아, 고대하던 순간이. 시야가 흐려지며 숨이 끊어지는 순간, 나는 너를 받아들이며 하나가 될 것이란 생각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빠져 죽는다 한들, 죽어버린 호숫가에서. 내 몸 하나를 던져 드디어 너에게 맞닿을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살아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생을 잇고자 하였던 단 하나의 이유.”

세상 무엇보다 연약하고 믿음이 강했던 한 신관을 위하여. 가여운 자들을 굽어살펴, 공허의 공간으로 조용히 인도하는. 초점 없는 눈동자를 다시 한번 바라보기 위하여. 마지막 순간, 사랑했던 그것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이 목소리를 네가 들어주었으면 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더는 아무것도 욕심이 나지 않았다. 힘없이 손을 놓아도 편안할 것만 같았다.

 

'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브아메_살아남다]  (0) 2019.03.31
[엠퍼아인_결말]  (0) 2018.12.01
[에브아메_호수, 달]  (0) 2018.09.30
[아메에브_파도]  (0) 2018.08.19
[아메에브_꽃]  (0) 2018.07.05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