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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리히_호수]

✿달꽃 2018. 6. 23. 23:51

이전에는 꽤 많은 인간이 찾아왔습니다. 꽃을 엮은 머리띠며, 초를 띄운 종이배. 들고 온 공물들을 띄우며 들릴 듯한 목소리로 제각기 소원을 비는 것을 멀찍이 구경하는 일도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맑은 물이 흘렀고, 수면에는 깊은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였습니다. 죽어버린 탁한 물보다는 깨끗한 물이 오히려 투명하기에 얼마나 깊은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생명 하나 살지 않는 이곳에는 오가는 발길이 만들어낸 작은 길과 지나간 자들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전부 옛이야기지만.”

 

그렇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했습니다. 숲에서 이곳으로 지나오며 자박거리는 발도 끊겼습니다. 초목은 길을 덮었고, 기도문을 외며 신을 찾는 자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곳은 나와 그, 둘뿐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인간들이 사라진 것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혼자서만 독차지하고 싶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단순한 질투였지만. 그가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날은 오지 않을 테지만, 만약 이 마음을 들킨다면 분명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겠죠.

 

여전히 물은 맑고, 깨끗합니다. 특히, 달이 가득 차오르는 날은 수면에 비치는 달빛은 찬란하게 부서지며 눈을 시리게 만드는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엷게 퍼뜨린 에메랄드빛 하늘에 부서진 빛 조각을 빠뜨립니다. 단어 그 자체로 나는 깨끗함을 몸으로 헤엄치고 있습니다. 너는 달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며 내 하늘에 담고 있습니다. 너에게 빠졌고, 그곳에서 몸을 던져 헤엄치고 있습니다. 빠져 죽더라도 행복할 이곳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이 호숫가의 내 사랑에서.

 

너는 호수가 되었습니다.”

 

눈이 시려와 한껏 인상을 찌푸립니다. 어느 새부턴가 너는 호수를 넘어서 바다처럼 넓어지고 있습니다. 너는 신을 섬겼습니다. 어떤 뿌리들보다, 더욱이 너는 기도를 올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걸으며 정해진 진리라며 뜻을 이루길 염원했습니다. 기어이, 너는 스스로 신이 되었습니다. 찢고 베어 넘기며 길을 만들고,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그 열쇠가 되겠다며. 너는 철저하게 자기를 되뇌고, 속삭이며 신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자리까지 올라가 버린 너를. 마지막에서 네가 호수가 되어 사라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이전에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블루헨.”

 

나는 완연하게 피어난 꽃. 네가 스스로 뜻이 되겠다면, 나는 이곳에서 숲이 되겠습니다. 너도 빚어질 때는 그릇이 깃든 채로 만들어졌으니. 신이 되더라도 지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이곳으로 내려와 주세요. 당신이 내려보내는 빛을 받아마시며 눈부시게 반짝이는 여린 잎과 가지로 덮어드리겠습니다. 힘든 순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도록. 나는 흘러가 이제는 잡을 수 없는 옛 기억에 취하며 미소짓고, 당신은 편한 잠을 잘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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