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퀘스트 신청 * 여신의 섬기던 자의 입을 빌려 말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빛이 꺾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모두가 손쓸 새도 없이 한순간에 일어나버린 재앙은 빛을 삼켰다. 검을 쥘 수 있으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붙잡으며, 그는 울부짖었다. 적을 베어버리던 검을 치켜들며 제 다리를 박아 넣으려는 서머터지와 일순간 울음을 다스리지 못하며 오열을 터뜨린 것 또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 무채색일지라도 색을 품고 있었다. 그마저 잃어버린 눈은 죽은 사람의 것이라 하여도 무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삼켜져 간신히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빛은 고개를 떨군 채 말문을 닫았다. 에브루헨에게 집중하라며 단호하게 말하던 잔소리며, 짧게 혀를 차는 것마저 사라져버렸다. “아메.” “…..
* 아인온 소량배포 엽서 작업본 * “아인.” “…의미 없는 짓이다.” 데모니오의 목소리에 아포스타시아는 눈을 감았다. 지탱하던 믿음이 깨져버린 후, 여신을 등지며 버렸던 옛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어느 존재에게 있어서 다가오게 될 끝. 의미 따위를 부여하며 마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여겼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다. 홀로 길을 걷는 그에게 나와 함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손 내밀길 주저하지 않았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 알려주어도 개의치 않았다. 참으로, 참으로 이상한 남자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응, 괜찮아.” “길의 끝에서…. 너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만나더라도, 헤어..
아포스타시아에게 여태 둘이 같이 있다가 멀리 떨어져서 혼자 밤을 맞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혼자 자는 게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요. 헤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무서움도 조금 떨쳐 내볼 겸 너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나갔다가 종이봉투가 찢어졌는지 쏟아진 과일을 보고는 어쩔 줄 모르는 여자를 도와주었어요. 주변에서는 그냥 흘끗 보면서 제 갈 길을 가기 바빴고, 여자는 품에 가득 봉투를 안고 있어서 물건을 내려놓고 주워 담기에는 조금 힘들어 보이더라고요. 나와는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 여자와 네가 겹쳐 보이더군요. 시장에서 카레 재료를 사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봉투가 찢어진 것도 모르고 길바닥에..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다.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꽤 생생한 느낌이었다. ‘…생생해?’ 일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생생하다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창가를 바라보았다. 커튼은 햇빛을 한가득 머금은 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톡 건드리면 봄기운을 타고 흘러온 햇빛이 방 안으로 환하게 쏟아질 것만 같았다. 무거워. 인상을 찌푸리며 무겁게 자신의 몸을 누르고 있는 ‘무언가’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는 자신의 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한쪽 다리는 하반신 위에 걸쳐놓은 채 세상모르고 현실이 아닌 곳을 여행 중이었다. 잠에 취해서는 몽롱한 정신은 지금― 자신의 처지는 물론이요, 적절한 대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커다란 곰 인형 끌어안는 듯 자신의 몸을 누르..
* 원고의 일부분입니다 * 비꽃 : 비가 오기 시작할 때 성글게 떨어지는 빗방울 12월 2X일 일기는 참으로 신기한 물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도 하고, 나처럼 혼자서 무언가를 털어놓거나 글로 쓰면서 기록을 할 수도 있고.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서 같은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고대인 씨는 거짓말을 할 때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더듬습니다. 얼마 전에 부엌에서 생선 통조림을 꺼내 가며 실험에 쓰일 자료로 사용할 것이라는 필요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고대인 씨의 뒤를 밟았습니다.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고양이 씨의 밥을 챙겨주고 있었습니다. 허겁지겁 밥을 먹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고양..
* 아인온에 나올 엽서 글원고 * 엽서에 들어갈 분량을 초과해서 원본은 티스토리에 올립니다.작업본은 원본에서 수정을 거쳤습니다. 처음은 정말이지 단순한 발상이었다. 차를 즐겨 마시는 서머터지를 보며 자신의 방식을 섞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생각.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그가 먹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이렇게 맛있는 것을 혼자서 먹을 수는 없죠. 단걸 싫어한다면 차와 함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찾아주고 말 거에요. 기다려요, 아메. 내가 기가 막히게 맛있는 케이크를 보여주겠어요. * “아메, 이거 한 번 먹어봐요.” 에브루헨은 막 찻잔을 들려던 서머터지에게 말했다. 에브루헨이 들고 있는 접시로 도르륵 움직이는 물빛 눈동자. 그 눈동자는 그..
* 아메에브 요소 有 * “아포스타시아.” “…유리 인형.” 낮게 가라앉다 죽어버린 목소리에 서머터지는 이를 갈았다. 듣기만 해도 속에서 무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끓는 것이 치밀어 올랐다. 에브루헨이라면 이것이 ‘무엇’이라고 가르쳐줄 것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탁하게 색바랜 녹빛 호숫가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를 어쩔 셈인가요?” “에브루헨 아모치온. 이것을 굉장히 아끼는군.” “네게 대답을 해 줄 이유는 없습니다. 헤니르에 몸을 팔아넘긴 저급한 자와 말을 섞을 의무도 물론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암녹빛 호수가 찰랑거렸다. 아포스타시아는 품에 안아든 에브루헨의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하는 소리가 들리자 서머터지는 입술을 사납게 물어뜯었다. 터져 나온 상..
* 의식의 흐름 多 *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과연 하늘인가? 맑은 호수의 수면인가? 아포스타시아는 비치는 모든 것을 믿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생각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들였다. 이것은 달콤한 향으로 먹이를 유혹하는 생명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보이는 것에 발길을 옮기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침 가득 흐르는 천적의 입속. 빠져나올 길이라곤 찾을 수 없는. 허둥거릴수록 옭아매는 손길. 지독하리만치 맑고 신성한 힘. 지나치게 맑은 호수에는 생명체조차 살 수 없었다. 담아내는 것이라곤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구분할 수 없는 파아란 세상이었다. “아메 서머터지.” “….” “너도 알았겠지.” 사방을 감싸 안는 파란 세상. 따갑도록 들어오는 맑은 빛에 아포스타시아는 눈을 찌푸렸다. ‘..
…또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군. 분명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있었겠지. 너는 잊을 만 할 때쯤 자신을 어두운 곳으로 빠뜨리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거냐. 데모니오는 몸을 덜덜 떨며 아포스타시아의 말을 들었다. 죽어가는 여름 너머로 찾아오는 날씨치고는 그렇게 춥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여길만도 하건만, 애처로이 몸을 떨던 데모니오는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있는 아포스타시아를 바라보았다. 생명이라곤 오래전에 죽어버린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암녹빛 호수에 오늘도 몸을 던진다. 온기 따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접점이 없다면 자신이 만들면 그만이었다. 남들은 찾아오지 않을 호숫가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이곳은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마법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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