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아인.” “….” 몇 번을 부르던 이름이던가. 늘 그랬다. 이미 오래전에 버린 것이라 던진 말에 돌아오는 것은 등 돌리며 지워버린 옛 이름과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죽어버린 암녹빛 호숫가의 수면이 찰랑였다. 잔잔한 수면에 하나둘 수놓아지는 물결을 따라 그에게 눈을 옮겼다. 연모의 정을 품은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약속했다.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도 부서질세라, 귀를 찢고 소리 질러대는 혼돈의 속삭임에 스러질세라. 그는 정성스레 제 몸을 끌어안으며 끊임없이 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 마냥. 위태롭고 매 순간 가장 황홀하게. 데모니오는 아포스타시아라는 작은 씨앗을 손에 쥔 채 둥글게 몸을 말아 그것을 지켰다. ..
“늘 이렇게 도움만 받는군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이벨른은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솔레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흘끗. 그는 솔레스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오래전부터 이 땅을 이루는 만물의 근원이자 대륙을 사랑한 어머니가 내려보낸 엘. 태양의 마스터 자리에 오른 지 며칠 되지 않은 이 남자는 틈만 나면 자신의 서재에 들러 엘과 관련된 책을 빌려 갔다. 중앙 도서관의 입이 가벼운 사서의 말을 듣자 하니 엘에 관한 서적이라는 서적은 닥치는 대로 빌려가더란다. 사서는 ‘정말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세요’라며 까르르 웃어넘겼지만, 그는 그저 새롭게 자리에 오른 태양의 마스터가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유심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 마스터 이벨른?” 뚫어지라고 책과 자신을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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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 도르륵. 생명의 온기라고는 오래전에 발길이 끊겨버린 암녹색 호숫가에 가라앉은 눈동자가 움직이며 아포스타시아는 데모니오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소중한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불안정한 유리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만 보였다. 아포스타시아는 제 이름을 부르는 방향으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아인. 아인이라—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얼마 만이던가. 아니,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군. “….” “모든 것을 알았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회색빛 폭포 사이로 느껴지는 타인의 손길에도 몸을 내어준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알 수 없는 끝을 향하여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 손을 잡고 여행하는 자. 다른 인간들보다는 확실히 흥미가 가는 ‘마족’에..
“에브루헨 아모치온.” 꿈이라고 여기자니 생생한 느낌이요, 이것이 현실이라 받아들이자니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상황이 마치 꿈처럼 다가왔다. 죽어버린 암녹빛 호수에 햇볕이 스며들던 때는 언제였던가. 여신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고, 완벽하다 생각하던 믿음마저 깨져버리던 그날. 아포스타시아는 같은 아인체이스 이스마엘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 다른 아인체이스 이스마엘은 자신과 달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여신이 내려준 힘을 정갈하게 다듬고, 유대와 신뢰를 빨아들여 아름답게 꽃을 피워냈으니까. 자신과는 다르게.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다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던 것이 어제의 일인 것만 같았다. 아포스타시아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브루헨 아모치온은 그저 소리 없이 ..
* 의식의 흐름 多 * 탁. 여섯 장의 꽃잎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그렇게 너는 처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빛 바다 위에 걸려있는 검은 배조각 하나 없이 둥글게 걸려있는 달하나.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종이 위엔 눈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남빛 바다, 깨끗하게 열린 바다 위 둥글게 떠 있는 노란 섬 하나. 그리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서로를 바라보기 부끄러워하는 소년과 소녀. 그것이 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저, 저는 하르니에라고…해요.” 눈꼬리에 매달고 있는 물방울 두어 개, 손이 하얗게 질려버릴 정도로 목걸이를 쥐고 있는 손, 그리고 깜빡거리는 눈꺼풀 아래 그려지는 풍경 속에 비치는 눈동자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 항상 어떤 일이 시작되면 끝이 나고..
“…?” 감겼던 세상을 들어 올리자 내리 쬐는 햇볕에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항상 그와 놀러 오던 곳. 이 그늘에 앉아서 먹는 샌드위치를 좋아했다. 그리고 시간을 맞춰서 오는 탓에 이곳은 알맞게 그늘져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톡톡 떨어지는 햇살조각들을 눈으로 주워 담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모르게 다른 곳으로 정신을 놓아버리곤 했다. 사소한 것 하나 잊어버리지 않은 장소. 그와 함께했던 곳. …꿈인가? 에브루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숙소에서 부랴부랴 챙기던 돗자리며, 그의 품에서 떠날 줄 모르던 책. 책?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는 항상 정갈했다. 주위 동료들에게도 ‘그’ 하면 떠오르는 공통된 인상이었을 것이다. 작은 것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의 ‘그’가 책을 이런 곳에 두고..
* 개연성 없습니다 ** 의식의 흐름 多 * “조금만 더.” “….” 가만히 등을 쓸어내린다. 꼭 껴안고 있는 온기는 일말의 거짓 없이 그의 것이었다. 닿일 때마다 움찔거리며 예민하게 반응하는 목, 차분히 토닥여주는 손길의 마디마저. 이제는 눈을 감아도 손길로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그의 것이었다. 절대 이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이런 인연도 결말을 맞게 되기는 하는구나. 가만히 눈을 감는다. 끌어안는 손길에 괜스레 힘이 들어간다. 평소 힘이 들어가면 멍이 들세라, 부서질세라 소중히 다루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마지막의 그 순간마저. 너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하랴. 모양만 잡은 채 우물거리던 입을 연다. “아인.” “….” 돌아오지 않는 대답. “아인.”..
“….” 언어에는 위대한 힘이 깃들어있다. 그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입을 열어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온 소리는 언어라는 이름으로 공기를 타고 흘러가며 수많은 의미로 흩뿌려질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담아왔었다.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신비한 세계. 희망을 노래하는 소리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며, 안식을 위한 흐느낌은 마지막으로 걷는 망자의 앞길에 편안한 휴식을 기원한다. 목소리,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인 언어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깃들어있다. 그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어준 신관은 늘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엘소드. 꼭 기억하세요. 물리적인 힘도 ‘힘’이라고 칭하지만 말에도 그에 못지않은 ‘힘’이 있어요. 지도자는 항상 그 사실을 잊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