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루헨 아모치온.” 꿈이라고 여기자니 생생한 느낌이요, 이것이 현실이라 받아들이자니 눈앞에 펼쳐진 현재의 상황이 마치 꿈처럼 다가왔다. 죽어버린 암녹빛 호수에 햇볕이 스며들던 때는 언제였던가. 여신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고, 완벽하다 생각하던 믿음마저 깨져버리던 그날. 아포스타시아는 같은 아인체이스 이스마엘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 다른 아인체이스 이스마엘은 자신과 달랐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여신이 내려준 힘을 정갈하게 다듬고, 유대와 신뢰를 빨아들여 아름답게 꽃을 피워냈으니까. 자신과는 다르게.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다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던 것이 어제의 일인 것만 같았다. 아포스타시아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브루헨 아모치온은 그저 소리 없이 ..
* 의식의 흐름 多 * 탁. 여섯 장의 꽃잎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그렇게 너는 처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빛 바다 위에 걸려있는 검은 배조각 하나 없이 둥글게 걸려있는 달하나.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종이 위엔 눈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남빛 바다, 깨끗하게 열린 바다 위 둥글게 떠 있는 노란 섬 하나. 그리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서로를 바라보기 부끄러워하는 소년과 소녀. 그것이 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저, 저는 하르니에라고…해요.” 눈꼬리에 매달고 있는 물방울 두어 개, 손이 하얗게 질려버릴 정도로 목걸이를 쥐고 있는 손, 그리고 깜빡거리는 눈꺼풀 아래 그려지는 풍경 속에 비치는 눈동자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 항상 어떤 일이 시작되면 끝이 나고..
“…?” 감겼던 세상을 들어 올리자 내리 쬐는 햇볕에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항상 그와 놀러 오던 곳. 이 그늘에 앉아서 먹는 샌드위치를 좋아했다. 그리고 시간을 맞춰서 오는 탓에 이곳은 알맞게 그늘져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톡톡 떨어지는 햇살조각들을 눈으로 주워 담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모르게 다른 곳으로 정신을 놓아버리곤 했다. 사소한 것 하나 잊어버리지 않은 장소. 그와 함께했던 곳. …꿈인가? 에브루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숙소에서 부랴부랴 챙기던 돗자리며, 그의 품에서 떠날 줄 모르던 책. 책?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는 항상 정갈했다. 주위 동료들에게도 ‘그’ 하면 떠오르는 공통된 인상이었을 것이다. 작은 것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의 ‘그’가 책을 이런 곳에 두고..
* 개연성 없습니다 ** 의식의 흐름 多 * “조금만 더.” “….” 가만히 등을 쓸어내린다. 꼭 껴안고 있는 온기는 일말의 거짓 없이 그의 것이었다. 닿일 때마다 움찔거리며 예민하게 반응하는 목, 차분히 토닥여주는 손길의 마디마저. 이제는 눈을 감아도 손길로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그의 것이었다. 절대 이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이런 인연도 결말을 맞게 되기는 하는구나. 가만히 눈을 감는다. 끌어안는 손길에 괜스레 힘이 들어간다. 평소 힘이 들어가면 멍이 들세라, 부서질세라 소중히 다루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마지막의 그 순간마저. 너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못하랴. 모양만 잡은 채 우물거리던 입을 연다. “아인.” “….” 돌아오지 않는 대답. “아인.”..
“….” 언어에는 위대한 힘이 깃들어있다. 그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입을 열어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온 소리는 언어라는 이름으로 공기를 타고 흘러가며 수많은 의미로 흩뿌려질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담아왔었다.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신비한 세계. 희망을 노래하는 소리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며, 안식을 위한 흐느낌은 마지막으로 걷는 망자의 앞길에 편안한 휴식을 기원한다. 목소리,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인 언어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깃들어있다. 그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어준 신관은 늘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엘소드. 꼭 기억하세요. 물리적인 힘도 ‘힘’이라고 칭하지만 말에도 그에 못지않은 ‘힘’이 있어요. 지도자는 항상 그 사실을 잊지 않..
* 원더러 찬조 출연 * “그러니까…. 아메. 이걸 아메가 만들었다는 거죠?” “내가 만들었어요.” 언제나 영롱하게 반짝이던 에메랄드빛 호수가 무엇 때문인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을 생각하며 만들어준 그의 정성에 당장에라도 접시째로 씹어먹었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또 다른 일부분인 본능은 이것을 먹어선 안 된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새까맣게 그슬린 원반은 둥근 모양을 한 채 접시 위에 꿀이 발려져 있었다. ‘……팬케이크?’ “….”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능글맞게 넘어가던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몹시 당황했다는 증거. 에브루헨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아메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팬케이크와 자신을 번갈아 보던 시선이 꽤 거슬리는 듯 인상을 사납게 찌..
“…하트.” 아아…. 유백색의 그 환한 빛 아래서 영원히 뜨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눈동자. 무겁게 내려앉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고 촉촉하게 젖은 청백색의 바다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인다. 이윽고 고요하던 바다는 물결치며 흠뻑 물기를 머금으며 젖어 들어간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흐려진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던가. 태양은 죽어가고, 어둡게 그늘졌다. 생명을 잃어버렸다. 다시는 찾지 못할 잃어버린 이름과 함께. 손에 쥐어 들었던 것은 흐드러진 꽃 한 송이. 생을 살면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각오까지 다졌다. 모두 나의 책임이라고. 지켜내지 못했다며 머리를 감싸 쥐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던 그 순간에도 자신은.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작고 여린 몸은 바닥으로 쓰러지고 감긴 눈은..
* 말그대로 의식의 흐름 ** 두서없음 ** 퇴고 안함 * “정성은 알아줄 거라고…? 가당치도 않는 소리.” 모두 사탕발린 말에 지나지 않구나, 아가.하루에 몇 번씩이나 예배당 앞에서, 여신상 앞에서 그렇게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 빌었어. 제발, 제발 나에게 길을 알려달라고. 목소리를 알려달라고. 아인체이스, 아인체이스. 이름 부르던 그 목소리 한번 들려달라고. 언제부턴가 모르게 주변에 맴돌면서 웅웅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 제발…. 나에게. 나에게. 알려달라고. 진심을 담아 기도하던 손은 ‘그’에게 먹혀버려 이미 육신은 부서지고 있는데. “가엽기도 하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 “이렇게 갈구하는데도. 왜 그 여자는 너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을까?” 아― 이미 너를 잊..
너는 나를 사랑했나요? 채 나오지 못한 말이 소리로 화하지 못하고 입에서만 머무르다 사라진다. 비릿한 피 냄새 자욱한 그 너머로 흔들리는 소라색 하늘을 바라본 그 순간. 아아― 슬프기보단 어찌 이리 기분이 좋은지. 너, 나를 사랑했군요. 그렇지 않나요? 에브루헨. 에브루헨 아모치온. 무겁게 가라앉은 납빛 하늘은 빛을 덮어버렸고, 찢겨나간 살점과 땅으로 스며들지 못한 피 웅덩이가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들어버린 꽃을 사납게 불러대는 애달픈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쓰러진 꽃을 주워든 그의 손은 두려움에 떨었다. 감정은 버렸다고 늘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던 너였거늘. 역시 사라진 것이 아니었군요. 나는 있죠? 네가 아주 조금일지라도. ‘그것’을 내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다행이에요. 그렇..
* 사련하다 : 생각하며 그리워하다 * “….” 너는 누구보다 아름답게 피어났다. 누구에게 보이는 것도 아니요, 뽐내기 위한 것도 아닌 자연스레 빛을 발하던 매력이 유달리 남들과 달랐던 너. 기쁨과 웃음을 받아 마시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추어올렸다. 황홀하구나. 너의 향. 너의 미소. 사랑스러운 너의 매력을 어느 누가 싫어하던가. 모두가 너를 아끼고 사랑하니. 그에 화답하는 듯 탐스럽게 향을 바람길에 실어 보내며 스스로 빛낼 줄 알던 아리따운 여린 존재여. “나는….” 세상 어느 사람, 아니 어떠한 존재보다 기억에 남고 싶었다. 마음속에서. 그 깊은 곳 가장자리에서 색이 바래 희미해지는 추억일지언정. 너는 잊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너를 아름답게 만드는 동시에 이렇게 망가지게 만든 야속한 ‘감정’이라는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