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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아메_주마등]

✿달꽃 2017. 6. 11. 00:47


 너는 나를 사랑했나요? 채 나오지 못한 말이 소리로 화하지 못하고 입에서만 머무르다 사라진다. 비릿한 피 냄새 자욱한 그 너머로 흔들리는 소라색 하늘을 바라본 그 순간. 아아― 슬프기보단 어찌 이리 기분이 좋은지. 너, 나를 사랑했군요. 그렇지 않나요?

에브루헨. 에브루헨 아모치온. 무겁게 가라앉은 납빛 하늘은 빛을 덮어버렸고, 찢겨나간 살점과 땅으로 스며들지 못한 피 웅덩이가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들어버린 꽃을 사납게 불러대는 애달픈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쓰러진 꽃을 주워든 그의 손은 두려움에 떨었다. 감정은 버렸다고 늘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던 너였거늘. 역시 사라진 것이 아니었군요.

 나는 있죠? 네가 아주 조금일지라도. ‘그것’을 내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난 정말 슬펐을 거예요.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너를 위해 죽어줄 수도 있을 정도인데.

소리 없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제 이름을 연신 부르며 쓰러진 몸을 안아 올리며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하늘을 향해. 힘없이. 미소를 짓는다.


*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작은 생명조차 살지 않는 소라색 호수에 비친 에브루헨은 돌아온 반응을 이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메. 네가 함께하고 있는 엘 수색대도 엄연한 인간이에요. 여신께서 이 땅에 창조하신 ‘인간’이라고요. 도대체 너는 왜 인간들을 그렇게 싫어하는 거죠?”

 어떤 존재든 살아있으면서 가치가 없는 것이 어디 있는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존재라 하더라도 그는 누구보다도 여신과 가까워지길 희망했다. 여신을 닮고 싶어 했고, 항상 여신을 위해서 살리라 기도를 읊었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다. 부여받은 권능은 더욱더 빛을 발하고 악한 것을 처단하는 검날은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강림하는 신을 대신하여 이 땅에 내려온 대리자. 신의 외형을 두른 채, 여신과 같은 힘을 사용하는 자. 모든 것이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창조하며 사랑을 담아서 만든 인형들은 오직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범하고 해친다.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린 존재에게서 헤니르에게 먹혀버린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등을 돌렸다. 배울 것이라고는, 그들의 존재에서 가치 있는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치부해버렸다.

 웃음에서 쓴맛이 배어 나왔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그녀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기에. 자신과는 다른 방법. 그만의 방법으로 사명에 임하는 것일 뿐이다.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무어라 발언할 자격은 자신에게 없었다. 물론 그도.

 ‘그들’과 함께하며 많은 것을 보았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거늘, ‘그들’은 마치 자신에게 닥친 일인 것 마냥 그 일을 함께해주었다. 웃고, 슬퍼하고, 같이 고민해주기까지. 알 수 없는 바람이 자신을 감쌌다. 의미 없이 휘젓던 바람은 의미를 담고. ‘그들’에게서 보던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들어 포근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여신에게서 부여받은 권능과 반응하여 함께 움직였다. ‘그들’과 함께하며 마음으로 담아온 신뢰와 유대. 신성한 힘과 반응하여 새로운 서약을 맺어내 또 다른 힘을 창조하나니. 그와 함께 피어나는 ‘감정’은 빠르게 스며들었다. 아…. 이것이 바로 ‘그들’이 느끼던 것이구나. 따뜻하고, 차가우면서도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 그리고 마치 환영을 보는 것처럼 황홀한 느낌마저 드는 이것. 인간의 언어로는 풀어내기 힘든 것들.

 이것들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명이 아닌. 다른 의미로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을.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뛰던 이것의 의미를 이제야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설령 내가 먼저 끝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기쁘게….


*


 “….”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머리는 차가워지며 오히려 정신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 순간, 정말로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구나. 그 모든 것들이 당신으로 가득해. 따뜻하게 데워지던 몸이 식어간다. 몸 안의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비명을 지르며 날이 잔뜩 선 느낌이 마지막까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든다.

 “아메.”

 “아, 아아…. 에, 에브. 에브루헨….”

 “아메. 나…. 아메.”

 온기를 품고 있던 마지막 빛 조각마저 사라지며, 눈꺼풀이 닫힌다. 엷게 서리던 에메랄드빛 하늘이 닫히고. 유일하게 무겁게 내려앉은 납빛 하늘을 마주 보며 반짝이던 빛이 사라졌다. 감싸던 포근한 바람도, 조화를 노래하던 노래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나, 너를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언정

그 끝을 향해 화려하게 떨어지리다.


나, 너를 사랑하기에

떨어지는 그 순간 지나가는 주마등마저

당신으로 채워지길.


나, 너를 사랑하기에

눈을 감는 그 순간마저 당신이 나를 봐주길 바라오.

그것만큼 바라는 것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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