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 캐해석 주의* *선동과 날조 주의* 주사위 두 개가 손이 움직이는 대로 놀아나고 있었다. 주사위에서는 은은하게 푸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애처로운 주사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옅은 보랏빛을 띠기도 하고 초록빛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얼핏 보면 환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만 같았다. 심심하거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손장난으로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그의 유일한 버릇이었다. 루토에게서 시공의 관리자 직책을 넘겨받을 때, 너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희’에 필요한 물건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던져준 주사위 두 개. 루토가 말한 ‘가장 큰 유희’에 필요한 물건이라는 것은 이렇게 의미 없는 손장난을 지칭하는 것인지. 왜 자신에게 주사위를 건네준 것인가? 알다..
“당신의 이름은 아인체이스 이스마엘.” ‘…!’ 넘실거리는 푸른빛이 온몸을 감싸들았다. 아득하게 먼 옛 기억. 익숙한 풍경. 인간들이 천계라 부르는 신들의 공간. 그립고도 아늑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여, 여신이시여.” “때가 되었습니다. 나의 대리자여, 나를 대신해 엘의 기운을 되돌려주고 오세요.” 여신을 대신하여 엘리오스에 내려가 줄어든 엘의 기운을 되돌려주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자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 “아인체이스. 그들에게 깊게 관여해선 안 됩니다.” “…?” “‘그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형태를 갖춰 사명을 다하고 오세요.” “여신의 명. 받듭니다.” 방해되는 요소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여신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
“으음….” 잠에 취한 목소리가 짧게 흘러나왔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자 잠시나마 흐리게 보이던 시야가 깨끗하게 들어왔다. 익숙한 방의 천장이 보였다. 뺨 쪽에서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땀에 젖어 목에 착 달라 붙어있는 머리카락의 감촉.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묘하게 욱신거리는 두통. 평소와는 달리 모든 것에 대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페이타 마을에서 갑작스레 출몰한 마족들의 수는 그의 예상 범주를 뛰어넘을 정도였다. 이스마엘께서 내려주신 사명.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치가 떨리는 존재, 마족. 상당한 수의 마족들을 본 그는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
사무치게 아려오던 겨울 기운이 유난히 심하게 느껴졌다. 요새 지하의 깊숙한 이 공간도 예외 없이 겨울 기운을 피해가기란 어려웠다. 멀리서 바라본 보존 장치는 하얀 꽃 한 송이를 소중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나 ‘멀리서’ 바라본 보존 장치의 풍경이었을 뿐. 실제로는 가사상태에 빠진 여인의 육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몸속 깊이 기어들어 오는 차가운 기운에 순간 몸을 움츠러뜨렸다. 헐거워져 덜걱거리는 가면을 고쳐 쓰며 쓰고 있던 후드를 깊이 끌어내렸다. 손에는 백합 한 송이가 색바랜 종이에 감싸진 채 투박하게 들려있었다. 어제는 흰 제비꽃, 오늘은 하얀 백합 한 송이. 매일같이 달라지는 꽃들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꽃과 함께 활짝 웃어야 할 그녀는 무..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끼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가면 속에 가려져 있던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물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가질 수 있는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생기가 사라진 붉은 기운은 어두운 그림자에 잠겨버린 채 서서히 가라앉는 듯했다. 오래전에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굳게 다문 입 또한 그가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렸다는 것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보존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공명석이 반짝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고 있던 꽃다발을 곁에 내려놓았다. 그는 멍하게 보존 장치를 쳐다보았다. “하르니에….” 넘실거리는 빛 안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여인.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보기엔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이는 안색.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불안정한 유리 꽃과도 같은 여인. 함..
“…으음.” 한번 내려갔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녔다. 드론 수리를 마무리 짓던 중 무겁게 짓누르던 잠을 못 이겨 잠시 눈을 감았다. 마인드의 기억은 그 부분을 마지막으로 끊겨버린 듯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나 잠이 들어버린 거지.’ 방 안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켜놓고 있던 스탠드 등만 환하게 책상 위를 밝히고 있었다. 마인드는 말없이 자신이 수리하고 있던 드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은 끔뻑거리며 제 할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신은 아직 잠에 취한 듯 멍하기만 했다. 팔꿈치에 밀려 자료 한 장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인드는 바닥에 떨어진 자료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담요 한 장이 떨어졌다. ‘…?’ 옅은 보라색 담요.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사이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