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끝난다면” “응?” 기사는 한가득 욱여넣고 있던 빵을 입에 문 채 신관을 바라보았다. 열셋의 나이에서 훌쩍 커버렸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신관은 미소를 지었다. 신관은 기사에게 천천히 먹으라는 듯 손을 흔들었고, 알겠다는 웅얼거리는 말과 함께 몇 번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켜내고는 기사는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의 모습에 신관은 천천히 먹으라고 했잖아요, 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잠깐 끊었던 말을 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의 일상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갑자기 그 질문은 왜?” 기사의 질문에 신관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주 보는 눈동자가 똑같이 깜빡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인 듯, 신관은 눈동자를 구석으로 도르륵 굴리고는 볼을 긁적였다. “갑자기라..
푸르게 젖은 호수에 둥둥 몸을 띄웁니다. 생명 하나 살지 않는 이곳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죠. 다른 이들에게 알려줄 수도 있지만 소중한 것은 나만 보고 싶다는 마음에 빗장을 걸고 꼭꼭 숨겨둡니다. 이것은 오직 나만의 것. 결단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만 허용되었으면 하는 작은 욕심이자 바람. 오랜 시간 몸을 던져도 차가워지지 않습니다. 활짝 웃으며 볼우물을 패여 냅니다. 그리고 호숫물을 가득 담습니다. ‘맑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입니다. 나는 너에게 완전히 내 것을 내주었습니다. 너에게 빠졌습니다. 말이란 전하지 않는 한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정확히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이것을 보고 있는 글 또한, ..
“내가 문제 하나 낼까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따뜻했던 조각 일부분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것은 깨져버린 파편의 마지막이며 빛마저 희미하여 잊어버릴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둥둥 떠버린 이것들을 해치워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건드리면 크게 데일 쪽은 날카로운 조각이 아닌 그것을 만지는 자신이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 생각이야 나버린 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평소처럼 흘려보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여기 있는 조각은 분명— 아아, 그래. 분명 그때 신관은 문제 하나를 냈었다. 손에 잡을 수 없으며, 상대방에게 전하기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것. 때때로, 이건 목을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는 문제였던가? 기사는 인상을 찌..
휘날리는 바람에 출렁이는 꽃 바다의 가운데서 몸을 던진 너는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은 장소. 오직 너에게만 허용된 비밀의 장소. 아니, 사실 수평선 너머까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드리워진 이곳은 너를 보며 하나둘 피워냈던 꽃들이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이곳에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곳에서 너를 만나길 간절히 바랐다. *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요.”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하고, 들켜버린다면 두근거렸다. 몸을 타고 흐르는 피라는 피는 한곳에 몰려버린 것처럼 뜨거워지면서.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것은 아닌데…. 이리하고, 저리한들 혼자서 심술만 잔뜩 나버린 채 신발코로 흙바닥만 긁어 작은 모래성만 만들어버렸다. 어린아이도 아닌 것이…. “너는 ‘이것’을 알..
"그래요, 이게 우리가 정한 결말이죠?” “모두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처음으로 네 의견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에브루헨은 고개를 끄덕였다. 뜻을 내세우며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물며 품에 사랑하는 사람을 안으며 눈을 감는 방법도. 모두가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로 끝나지 않는 동화의 마지막 페이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명백한 사실이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아포스타시아도, 에브루헨 아모치온도 모두 알고 있을 변하지 않을 진실.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함께해서 좋았다는 말과 더불어 소소하게 일상 속에서 불만이 있었다거나 아쉬웠던 이야기…. 에브루헨은 여느 때보다 고개를 활짝 들춰내고는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채소볶음은 잘했는데 너는 매일..
* 아메에브 요소 有 * “아포스타시아.” “…유리 인형.” 낮게 가라앉다 죽어버린 목소리에 서머터지는 이를 갈았다. 듣기만 해도 속에서 무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끓는 것이 치밀어 올랐다. 에브루헨이라면 이것이 ‘무엇’이라고 가르쳐줄 것이었지만 문제는 그가 탁하게 색바랜 녹빛 호숫가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를 어쩔 셈인가요?” “에브루헨 아모치온. 이것을 굉장히 아끼는군.” “네게 대답을 해 줄 이유는 없습니다. 헤니르에 몸을 팔아넘긴 저급한 자와 말을 섞을 의무도 물론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암녹빛 호수가 찰랑거렸다. 아포스타시아는 품에 안아든 에브루헨의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하는 소리가 들리자 서머터지는 입술을 사납게 물어뜯었다. 터져 나온 상..
…또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군. 분명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있었겠지. 너는 잊을 만 할 때쯤 자신을 어두운 곳으로 빠뜨리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거냐. 데모니오는 몸을 덜덜 떨며 아포스타시아의 말을 들었다. 죽어가는 여름 너머로 찾아오는 날씨치고는 그렇게 춥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여길만도 하건만, 애처로이 몸을 떨던 데모니오는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있는 아포스타시아를 바라보았다. 생명이라곤 오래전에 죽어버린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암녹빛 호수에 오늘도 몸을 던진다. 온기 따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접점이 없다면 자신이 만들면 그만이었다. 남들은 찾아오지 않을 호숫가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이곳은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마법의 장소였다...
“아인.” “….” 몇 번을 부르던 이름이던가. 늘 그랬다. 이미 오래전에 버린 것이라 던진 말에 돌아오는 것은 등 돌리며 지워버린 옛 이름과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죽어버린 암녹빛 호숫가의 수면이 찰랑였다. 잔잔한 수면에 하나둘 수놓아지는 물결을 따라 그에게 눈을 옮겼다. 연모의 정을 품은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약속했다.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도 부서질세라, 귀를 찢고 소리 질러대는 혼돈의 속삭임에 스러질세라. 그는 정성스레 제 몸을 끌어안으며 끊임없이 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 마냥. 위태롭고 매 순간 가장 황홀하게. 데모니오는 아포스타시아라는 작은 씨앗을 손에 쥔 채 둥글게 몸을 말아 그것을 지켰다. ..
“늘 이렇게 도움만 받는군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이벨른은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솔레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흘끗. 그는 솔레스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오래전부터 이 땅을 이루는 만물의 근원이자 대륙을 사랑한 어머니가 내려보낸 엘. 태양의 마스터 자리에 오른 지 며칠 되지 않은 이 남자는 틈만 나면 자신의 서재에 들러 엘과 관련된 책을 빌려 갔다. 중앙 도서관의 입이 가벼운 사서의 말을 듣자 하니 엘에 관한 서적이라는 서적은 닥치는 대로 빌려가더란다. 사서는 ‘정말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세요’라며 까르르 웃어넘겼지만, 그는 그저 새롭게 자리에 오른 태양의 마스터가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유심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 마스터 이벨른?” 뚫어지라고 책과 자신을 바라보..
“아인.” 도르륵. 생명의 온기라고는 오래전에 발길이 끊겨버린 암녹색 호숫가에 가라앉은 눈동자가 움직이며 아포스타시아는 데모니오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소중한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불안정한 유리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만 보였다. 아포스타시아는 제 이름을 부르는 방향으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아인. 아인이라—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얼마 만이던가. 아니,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군. “….” “모든 것을 알았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회색빛 폭포 사이로 느껴지는 타인의 손길에도 몸을 내어준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알 수 없는 끝을 향하여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 손을 잡고 여행하는 자. 다른 인간들보다는 확실히 흥미가 가는 ‘마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