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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샤_크레이프]

✿달꽃 2017. 2. 12. 19:41

  “아으….”

  마법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댔다.

  마족들과의 전투에서 적을 얼려버리는 역할로 사용되던 물의 원소 마법. 하지만 최근 벌어진 전투에서는 물 원소 마법에 대해서 내성을 가진 마족이 등장하면서 자신의 전투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전혀 다른 속성의 원소를 혼합하여 사용한다면? 순간 머릿속으로 번뜩 지나간 획기적인 생각. 정말로 구현할 수 있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들에게도 필시 도움이 되리라.

  이렇게 시작된 연구는 생각보다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분명 맞을 것이라 생각하며 계산을 해도 번번이 오차범위를 벗어나버렸다. 성과가 좀처럼 나오는 것이 없자 신경은 날카로워졌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않은 몸은 축 늘어지고, 마음은 괜스레 가라앉기만 했다.

  계산 중이던 펜을 내려놓고 마법학 고서 몇 권을 꺼냈다. ‘상위 마법진 연성’이라고 적힌 고서 한 권을 펼쳐 들어 불 원소 마법에 대하여 기록된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불의 원소는 4대 원소 중 가장 난폭한 성향을 가진 원소로써, 불 계열 마법에서도 마법진을 그리거나 캐스팅하는 과정은 마나를 섬세하게 운용하는 능력이 필수로 요구된다. 때문에 불 원소 마법이 상급마법으로 분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불의 힘은 상위 마법진을 구성하는 육망성에서 정삼각형을 이루는 부분이며 도형의 위치에 따라서 같은 캐스팅 과정에도….”

  고서를 작게 읊조리며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며 신랄하게 춤을 추는 깃펜은 새로운 계산을 그려냈다. 책상 위를 밝혀주는 스탠드 등은 한층 더 밝게 반짝였다.

 

*

 

  새벽이 여물게 익어가는 어두운 시간. 부엌에서는 아직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찰그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릇한 빛을 띠는 계란물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였다. 체에 거른 박력분이 계란물 위로 천천히 쌓인다. 한겨울에 내리던 눈을 보는 것만 같았다.

  곱게 걸러진 가루가 날리는 탓에 시야가 흐려지자 청은 눈을 찡그렸다.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렌즈를 바라보았다. 계란을 저을 때 튄 자국이며 곱게 걸러진 가루들이 렌즈에 묻은 것을 보고서는 두르고 있던 하얀 앞치마에 대충 닦아내고는 안경을 고쳐 썼다. 우유와 따뜻하게 녹인 버터를 부었다. 볼을 손으로 단단히 잡고는 거품기로 휘젓기 시작했다. 계란물에 섞인 박력분이 거품기에 단단하게 뭉치던 느낌도 잠시, 섞으면서 점점 부드러워진다는 감촉이 손에 착 감겨왔다.

  젓던 것을 멈추고 거품기를 들어 올렸다. 노르스레한 반죽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콧잔등을 쓱 닦아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굽기 알맞은 농도. 평소보다 반죽이 잘됐다는 사실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반죽을 한 쪽으로 젖혀두고, 바구니에 담긴 바나나 한 개를 집어 들었다.

  ‘…걔가 바나나 좋아했었지.’

  일정한 간격으로 바나나를 두 개쯤 자를 때, 약하게 불을 올려두고 예열하고 있던 프라이팬이 생각났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프라이팬 위로 살짝 손을 올리자 뜨거운 기운이 훅 느껴졌다.

  반죽을 한 국자 떠내어 프라이팬 위에 얇게 펼쳤다. 얇게 편 노릇한 반죽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구워지는 속도가 빨랐다.

  볼에 담긴 반죽을 다 구워내자 벚꽃잎이 몇 개 수놓아진 접시 하나를 꺼내 들었다. 크레이프 한 장에 생크림을 바르고 잘라두었던 바나나를 올렸다. 생크림을 바르고 과일을 올리기만 수차례. 겹겹이 생크림과 바나나가 올라간 두툼한 크레이프.

  얼음이 담긴 컵에 레모네이드를 따랐다. 초콜릿 색깔의 쟁반 위에 크레이프 접시와 레모네이드 한잔을 올려놓은 뒤에야 그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 이렇게 피곤하던가?”

  그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개수대 한구석에 담겨있는 계란 껍질, 빈 우유갑과 하얗게 눈이 내린 흔적이 남아있는 체. 거뭇거뭇 반죽이 묻어있는 거품기. 크레이프를 만드느라 벌어놓은 잔해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머릿속으로 생각지도 못한 간식을 보고서 웃음 짓는 그녀를 상상했다. 아무렴 어떤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면 가끔 이런 이벤트도 나쁘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손자국이 묻은 렌즈를 옷자락으로 대충 닦아내고 안경을 고쳐 썼다. 그는 쟁반이 엎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들어 올리고는 마법사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똑똑.

  그는 문을 두드렸다. 평소라면 누구냐고 묻는 말은 돌아와야 하거늘. 조용한 반응에 그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잠깐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하아.”

  방바닥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종이뭉치들. 책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는 고서들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고서가 쌓여있는 탑 중간에 삐죽 나온 자료 한 장이 팔랑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침대 위에 살짝 올려놓고는 자료를 주워 자료들이 많은 종이 더미 안에 쿡 집어넣었다.

  ‘요 며칠간 방 밖으로 나오질 않는 것이 이거 때문이었군.’

  깃펜은 손에 쥔 채 책장에 고개를 기대고는 고른 숨소리를 내뱉는 마법사가 조금은 안쓰럽게 보였다.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필시 눈물을 그렁거리며 잠든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리라. 그녀의 성격상 분명 그럴 것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진지하지 않은 성격처럼 보이지만, 학문에서는 자신에게 엄격했다. 더구나 마족과의 전투를 치르고 난 후,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것은 분명 이런 이유일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네모. 일어나.”

  “…으음.”

  눈꺼풀이 무거운 듯 좀처럼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마법사. 잠시 후–

  “…! 히익! 내가 얼마나 잠이 든 거야?”

  앉은 자리에서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싸매는 마법사. 그는 물끄러미 마법사를 바라보다 적당히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은 자면서 하는 거야?”

  “…아니.”

  “그럴 줄 알았지. 조금은 쉬었다가 해. 그러다 될 것도 안 돼.”

  “그렇지만…. 그런데 네가 왜 내 방에 있는 거야?”

  “계속 문 두드려도 반응이 없길래 들어왔어. 저녁, 안 먹었지?”

  “에…. 응. 아직 안 먹었어.”

  “밖으로 나온 걸 본 적이 있어야지. 간단하게 먹으라고 크레이프 한 번 만들어봤어.”

  그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으며 쟁반에 담긴 크레이프 접시를 마법사에게 내밀었다. 마법사는 크레이프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다 안 먹을 거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흔들며 그가 내민 접시를 받았다.

  투박해 보이면서도 얼추 모양새가 갖춰진 듯한 크레이프. 마법사의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가 그려졌다.

  ‘…얘가 요리할 줄 알던가?’

  “연구는 잘 되고 있어?”

  “…하아.”

  반사적으로 깊은 한숨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녀는 크레이프 접시를 책상 위에 얹어두고 턱을 괴며 인상을 찡그렸다.

  “속성이 다른 원소를 동시에 캐스팅시켜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는 사례는 몇 건 찾았어. 다만 그 당시에 사용됐다고 기록된 부분이 마모가 심해서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야. 결론은, 세우던 가설은 맞아떨어진다는 사실만 알아내고는 나흘 동안 건진 건 아직 아무것도 없어.”

  “…그래?”

  “응. 그래도 아까 좀 흥미로운 부분을 찾아내서 그걸 바탕으로 다시 계산하고 있는 중이야. 이번에는 계산이 꼭 맞을 거 같긴 한데…. 아직 잘 모르겠어.”

찡그리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점점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는 마법사. 두 손을 불끈 쥐며 나름의 결의(?)를 다지는 그녀를 보자 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 수색대 우두머리에게는 ‘멍청이’라고 부르면서 하루가 멀다고 싸우는 말괄량이가 지금은 ‘현재’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의 네가 좋아.’

  반쯤 뜬 눈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령서. 마음 한쪽에서는 그녀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질 않았다. 나흘 동안 잠을 제대로 취하지 않은 모습은 구석구석 드러났다. 푸석해 보이는 머리카락. 눈 밑으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무엇에다 아직도 잠이 취해서 제대로 깨지 않은 듯한 목소리.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녀는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냥 걱정돼서.”

  “…응?”

  “새로운 마법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뒤늦게 그 속에 담긴 말의 의미를 이해한 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크레이프 한 조각을 입에 밀어 넣고 기계적으로 씹기만 할 뿐. 먹고 있던 크레이프의 맛도 제대로 느껴지질 않았다.

  “느, 느, 늘 있는 일이니까 고, 괜찮아.”

  “그래도 조금은 쉬면서 해.”

  “…려, 령서야.”

  그는 쟁반에 담긴 레모네이드 한 잔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디저트만 건네주고 나올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네. 그는 마법사에게 바짝 다가갔다. 마법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고개를 올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프면 걱정되니까. 쉬면서 해. 알겠지?”

  “……응.”

  목에서 무언가가 걸리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제대로 나오지 않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게 대답해준 그녀의 답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물론 고개를 숙인 그녀는 그가 지은 미소를 보지 못했지만—방을 나섰다.

  “하던 것마저 하고 잠시 눈 좀 붙여.”

  “….”

  그가 방을 나선 지 한참이 지나서도 마법사는 한참 동안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얼굴에 확 달아오른 기운은 목에서 몸 전체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몸 전체가 두근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진정해. 진정해. 진정해.”

  네모는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아, 가라앉거라.

  볼에서 피어난 작은 꽃은 열기를 띠고 있었다. 두 송이의 꽃은 점점 퍼져 얼굴로, 목으로 점점 퍼져 커다란 꽃밭으로 번졌다.

  진정해. 두근거리는 마음아, 가라앉거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만들어준 바나나 크레이프의 맛이 아직 입에 남아있는 듯 입은 달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아, 가라앉거라. 달곰한 마음이 두근거리는 고동에 따라 꽃밭의 향기를 더해주었다.

  그는, 꽃밭에 퍼진 달곰한 향기를 맡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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