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미 불명 * “이 꽃이 왜 아름다운지 알아요?” “….” 유리 인형은 말이 없었다. 표정이며, 펜듈럼을 쥐고 있는 가느다란 하이얀 손마저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블루헨은 자신을 가리키며 눈꼬리를 휘며 리히터를 향해 웃어보였다. 더욱이 자신을 보라는 듯, 환하게. “모든 꽃은 예뻐요. 그렇지 못한 것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로. 그중에서도 제일 예쁜 건 나에요.” “에브루헨 아모치온” “…옛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네요.” “이제, 인간 놀음은 그만 두세요.” 인간 놀음. 블루헨은 펜듈럼을 손목에 묶고는 활짝 피어난 아이트를 톡톡 두드리며 손장난을 쳤다. 명백히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리히터를 흘긋 쳐다보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드러내는 도발에도 리히터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블..
“키우던 것이 죽어버리면 다들 슬퍼하잖아요.” 그만큼 애정을 들이고 눈길을 쏟아주었으니 슬플지언정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는 분명 행복할 거예요. 죽은 존재에게 말을 걸어서 대답을 요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지만, 그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면 이제는 식어버린 몸을 붙들고 울면서 갈라져 쉬어버린 목소리를 뱉어내겠나요?분명 그 파도는 오래갈 것이 분명합니다. 쌓아 올렸던 것들을 휩쓸어버리고 축축이 젖은 땅 위에서 눈물을 떨구면서 소리 내 울 것은 분명합니다. 소중히 여기던 것을 하루아침에 잃었기 때문에 웃으면서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아니더라도 작고 미미한 생명이라도 같은 것을 느낍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그렇습니다. “내가 죽으면 울어줄 거죠?” 서머터지, 너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내가 사랑하..
“너는 무엇이지.” 귓가에서 계속해서 맴돌던 목소리의 질문. 귀를 틀어막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도 보았다. 네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 나를 믿거라, 너는 무엇이지? 모두 끝을 맞이하고 소멸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느냐. 늘 한 손에 쥐고 있던 무거운 사슬을 지금은 풀어헤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신의 개가 아닌 ‘조화’라는 것을 택하던 그 녀석은 이것을 자유라고 말하던가. 자유라는 것은 가볍고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하게 옮아 매던 짐을 풀어헤치고 처음이자 지금 이 순간만 맛볼 공기.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느껴보는 그 녀석과 공유하는 듯했다. 이것이 네가 느끼던 것이로군. 나도 자유라는 것을 느꼈다. “너는, 무엇이지?”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
계절마다 피어난다. 걸어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온기는 모두 지난날의 차가운 바람을 받아 마시며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네가 가지고 있던 이것을 나누어줌으로써 또 새로이 시작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구나. 한 송이마저 소중하지 않은 꽃은 없었다. 모두 잎사귀 위로 내려앉는 시린 결정을 껴안으며, 차가운 바람에 저도 모르게 고여 버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어여삐 피어났겠지. 포근하고, 보드라우며,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것들이여. 땅 위를 걷는 신이 빚어낸 고운 인형. 그는 제가 가진 향을 찾아내 숲의 하늘을 눈동자에 담고 반짝였다. 그리고 마주한 옅은 분홍 꽃비 속에서 찾아낸 자신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았다. “여기 있었나요?”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아메, 네가 맑은 호숫가에 몸을 숨겼나, 그렇게..
* 리퀘스트 신청 * 여신의 섬기던 자의 입을 빌려 말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빛이 꺾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모두가 손쓸 새도 없이 한순간에 일어나버린 재앙은 빛을 삼켰다. 검을 쥘 수 있으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붙잡으며, 그는 울부짖었다. 적을 베어버리던 검을 치켜들며 제 다리를 박아 넣으려는 서머터지와 일순간 울음을 다스리지 못하며 오열을 터뜨린 것 또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 무채색일지라도 색을 품고 있었다. 그마저 잃어버린 눈은 죽은 사람의 것이라 하여도 무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삼켜져 간신히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빛은 고개를 떨군 채 말문을 닫았다. 에브루헨에게 집중하라며 단호하게 말하던 잔소리며, 짧게 혀를 차는 것마저 사라져버렸다. “아메.” “…..
* 아인온 소량배포 엽서 작업본 * “아인.” “…의미 없는 짓이다.” 데모니오의 목소리에 아포스타시아는 눈을 감았다. 지탱하던 믿음이 깨져버린 후, 여신을 등지며 버렸던 옛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어느 존재에게 있어서 다가오게 될 끝. 의미 따위를 부여하며 마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여겼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다. 홀로 길을 걷는 그에게 나와 함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손 내밀길 주저하지 않았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 알려주어도 개의치 않았다. 참으로, 참으로 이상한 남자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응, 괜찮아.” “길의 끝에서…. 너는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만나더라도, 헤어..
* 아인온에 나올 엽서 글원고 * 엽서에 들어갈 분량을 초과해서 원본은 티스토리에 올립니다.작업본은 원본에서 수정을 거쳤습니다. 처음은 정말이지 단순한 발상이었다. 차를 즐겨 마시는 서머터지를 보며 자신의 방식을 섞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생각.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그가 먹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이렇게 맛있는 것을 혼자서 먹을 수는 없죠. 단걸 싫어한다면 차와 함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찾아주고 말 거에요. 기다려요, 아메. 내가 기가 막히게 맛있는 케이크를 보여주겠어요. * “아메, 이거 한 번 먹어봐요.” 에브루헨은 막 찻잔을 들려던 서머터지에게 말했다. 에브루헨이 들고 있는 접시로 도르륵 움직이는 물빛 눈동자. 그 눈동자는 그..
* 의식의 흐름 多 *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과연 하늘인가? 맑은 호수의 수면인가? 아포스타시아는 비치는 모든 것을 믿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생각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들였다. 이것은 달콤한 향으로 먹이를 유혹하는 생명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보이는 것에 발길을 옮기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침 가득 흐르는 천적의 입속. 빠져나올 길이라곤 찾을 수 없는. 허둥거릴수록 옭아매는 손길. 지독하리만치 맑고 신성한 힘. 지나치게 맑은 호수에는 생명체조차 살 수 없었다. 담아내는 것이라곤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구분할 수 없는 파아란 세상이었다. “아메 서머터지.” “….” “너도 알았겠지.” 사방을 감싸 안는 파란 세상. 따갑도록 들어오는 맑은 빛에 아포스타시아는 눈을 찌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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